.../스물셋.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noey_ 2021. 7. 16. 13:52

다큐멘터리 영화.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였는데 나에게 "다큐=졸린 것"이라는 인식이 너무 강해서 섣불리 시도해보지는 못했던 장르였다. 그러던 요즘에 넷플릭스에서 하는 여러 다큐멘터리(자연, 예술 분야에 재밌는 게 참 많더라고요)를 보고 이 영화도 도전해보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고 JR과 바르다의 나이 차이가 무색할 만큼 나도 저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평범'하다는 것이 절대 '평범'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여러 생각을 하게 했고 참 좋은 소재가 많은 영화였다.

기억에 남는 장면 (순서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기억에 나는 순서대로)

1. 시작 부분에 우연히 마주치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고 "멋진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는 게 난 좋았어. 우연은 항상 최고의 조력자였거든"라는 말처럼 둘은 최고의 조력자가 되어 서로에게 멋진 인연이 된 것을 서로의 내레이션이 번갈아가며 나온다. 

2. 커다란 카메라가 그려진 차를 몰고 다니며 사람들의 사진을 찍는데 바게트를 입에 물고 혹은 들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사진을 크게 인화하고 그걸 벽에 붙여 하나의 거대한 바게트처럼 보이게 이어 붙인다. 처음에는 이게 뭘까...라고 생각하면서 봤는데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모습을 보고 참 묘했다. 한 아이가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아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사진을 찍은 사람이라고. 

3. 한 마을에서 일하는 아주 평범한 여자 분이 원피스를 입고 어울리지 않는 신발은 벗고 눈이 보이도록 안경도 벗고 양산을 들고 찍은 사진을 벽면에 붙여 마을에 놀러 온 사람들, 혹은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사진을 찍고 자신을 알아본다는 말을 했던 씬. 그 여자분과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자기는 수줍어서 조금 불편하다는 기색을 보였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해서 흔쾌히 찍었으나 갑작스럽게 유명인사가 되어버린... 이와 비슷하게 한 농가에서 일하는 사람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는 사람들이 알아보아 좋다는 말을 했다. 평범한 사람을 평범하지 않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새로운 경험이었을까.

4. 감탄하며 봤던 장면. 지금은 폐광이 된 탄광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사진을 집에 붙여둔 것. 그들을 본 사람도, 그 일이 어떤 일인지 겪어본 사람도 거의 없지만, 그렇게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지만 잊지 못하고 그곳에 유일하게 남아서 그 추억을 지키는 분의 얼굴을 마지막에 그녀의 집 앞에 붙이는데 그분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렇게 그냥 우셨다. 한 번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곳이었는데 찡했던 기억이 난다. 

 

5. 소금공장. 이 장면은 사진은 큰 감명을 받지는 않았다. 오전 근무자와 오후 근무자가 서로를 향해, 같은 공간에 있는 듯 서로를 향해 손을 뻗는 사진이었다. 촬영이 끝나고 한 직원 분의 인터뷰가 있었다. 알고보니 마지막 출근이었고 이제 은퇴하는 분이셨다. 내일 뭐할 거냐는 질문에 "늦게까지 잠을 자겠죠"라고 답했다. 그럼 그다음 날은 뭐할 거냐고 물어보니 "저도 은퇴가 처음이라서요"라고 답하며 아직은 모르겠다고 했다. 나이가 지긋해도 처음인 것이 있고 계속해서 나아가는 중인 것이다. 여기서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나는 내가 하고 있던 일, 공부라던가 하던 일이라던가 그런 게 끝나면 인생이 끝난 것처럼 섭섭하게 느껴지고 갑자기 우울해진다. 그런데 이 분의 인터뷰에서는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남은 이후의 일을 기대하는 듯했다. 난 아직 어리구나...라는 생각을 또 하게 되었던 부분이었다. 

6. 바르다가 시력 검사를 하고 자기는 글자가 위 아래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고 사람들이 글자를 들고 위아래로 흔드는 장면에서 했던 말. "난 흐릿하게 보지만, 자네는 (선글라스 때문에) 어둡게 보잖나? 사람마다 다 다르게 보는 법이야"

7. 염소. 와... 난 여기서 또 감탄했다. 염소가 어릴 때, 싸우지 않게 하려고 뿔을 태워버리는 농가가 있다. 그리고 기계로 젖을 짜는 곳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 익숙한 듯 염소들이 자리를 잡는다. 뭔가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며 보고 있던 그때, 뿔을 그대로 두고 손으로 젖을 짜는 농가에서 한 인터뷰가 있었다. 뿔을 태우지 않으면 염소들이 싸우지 않느냐는 질문에 "염소들은 싸우죠. 그런데 인간은 안 싸우나요?"라고 답했다. 내가 보기에는 인간이 사회 악인데...

8. 벙커가 떨어진 해안. 난 이상하게 여기서 머리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고 울컥했다. 공간 자체도 이질적이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벙커였는데 전쟁이 끝나고 일부러 떨어뜨린 후 방치한 것이었다. 바다의 물이 빠졌을 때, 바르다가 옛날에 찍었던 한 남자의 사진을 골라서 붙인다. 그리고 다시 물이 들어오자... 감쪽같이 없어졌다. 일종의 행위예술 같았다. 그 벙커에 사진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는 건 오직 작업한 사람들뿐이었겠지. 사라질 것을 알았겠지만 그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지만, 너무 공허했다. 뭐라고 말로 설명은 못하겠지만 누군가가 죽는다면, 이런 느낌일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9. 친했던 사진작가의 무덤에서 사진을 찍고 JR이 물어본다. "죽음이 두려우세요?" "아니, 많이 생각해보는데 두렵진 않은 거 같아. 마지막 순간이 될 텐데. 난 기다려지기까지 해." "정말요? 왜요?" "다 끝날 테니까" 

위에 벙커와 연결되면서 갑자기 울컥했다. 누군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거라고 했다. 어떻게 그걸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10. 기차에 늙어서 쭈글쭈글 주름이 생긴 바르다의 눈과 발 사진을 붙인다. "이 기차는 당신이 가지 못하는 곳을 많이 가겠죠."

11. 르아브르 항만. 항만 노동자의 아내들의 사진을 찍어 조각조각을 컨테이너 박스에 붙여 쌓은 후, 심장 부분에 컨테이너를 열고 그 안에 아내들이 들어가서 자유롭게 팔다리를 흔든다. 

12. 장 고르윅. 오랜만에 찾아간 그녀의 친구 집 유리면에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의 이름과 호수 이름을 적고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울면서 이런 장난은 재미없다고 한다. 여기서 또 울컥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했을까. 이런 글을 보고 그녀가 무슨 기분일지는 생각을 해보았을까. 너무 서럽게 우는 그녀에게 JR은 자기가 뭘 해줄까요 라고 물으며 선글라스를 처음으로 벗어 자신의 눈을 보여준다. 이때, 화면은 잘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처럼 흐릿하게 보여준다. 너무 스윗하다, JR... "자네가 잘 안 보이는데 그래도 자네가 보여"

JR이 스윗한 거는 정말 많은 장면에서 볼 수 있는데 주제를 놓쳤다며, 그런데 그 주제가 뭔지 기억이 안 난다는 투로 그녀가 말하며 부끄러워하자, 조용히 웃으면서 안아주는... (쏘스윗,,,) 

13. "할 말 없으면 포옹할까요?" 1달 전인가... 그쯤에 느꼈던 감정이었는데 목구멍까지 북받쳐서 터질 것 같을 때, 토닥여주거나 조용히 안아주면 나도 모르게 무너져 내린다. 그 기분을 이 사람도 알았을 것만 같았다. 

14. 오래된 친구라는 말에 "'오래된'보단 '길게 만난'이 좋아"라고 한 부분. 내가 전에 했던 일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만둔다. 일이 신체적으로는 전혀 고되지 않은데, 정신적으로 무너져 내리게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의도치 않게 2년 정도 하고 지금은 쉬고 있네) 아무튼, 그때마다 너무 좋은 사람들에게 했던 말이 "우리 오래 봐요"였다. 길게 본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인데 여기서도 그 얘기를 하고 있어서 너무 좋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사연이 있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잠시 그들의 얼굴을 바라봐 주는 건 어떨까.

'... > 스물셋.'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08.01. 근황  (0) 2021.08.03
Why are you still on your mark?  (0) 2021.07.22
2021.06.30 렁스  (0) 2021.07.01
2021.06.27 낮공 맥베스 트라이아웃  (0) 2021.06.28
2021 상반기 영화 정산  (0) 2021.06.22